은은 2025년 원자재 시장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반응했어요. 은 가격은 1980년 ‘은 파동’ 때의 고점을 45년 만에 넘어섰고, 연간 상승률도 140%를 웃돌면서 1979년 이후 가장 가파른 흐름을 만들었어요.
이 흐름은 단순한 안전자산 쏠림만으로는 설명이 잘 안 돼요. 예전엔 위기가 오면 금이 먼저 주목받았지만, 이번 사이클은 은이 금보다 더 빠르게, 더 크게 움직였어요. 하루 만에 10% 넘게 빠졌다가 7% 이상 다시 오르는 장면이 반복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은이었을까요?
휴지조각이 되는 돈
이 질문은 지금 시장의 바닥에 깔린 구조부터 봐야 풀려요. 미국 국가 부채는 37조 달러를 넘었고, 이자 비용은 이미 주요 재정 지출과 맞먹는 수준까지 올라왔어요. 금리를 높게 유지하면 재정 부담이 커지고, 금리를 내리면 통화 가치에 대한 신뢰가 흔들려요. 이 딜레마가 계속 쌓이면서, 시장은 이 문제가 단기간에 깔끔하게 끝나기 어렵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현금과 명목 자산을 예전처럼 ‘안전한 기본값’으로 보기 어려워요. 통화 공급이 늘어날수록 구매력이 천천히 희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시장에 퍼지고, 이게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 즉, 화폐 가치 하락에 대비한 투자 전략의 출발점이에요. 중요한 건 이 흐름이 물가 숫자 하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과 시장은 통화 시스템 자체의 신뢰를 다시 원자재의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마두로 생포에 놀란 은
지난 1월 3일 니콜라스 마두로 체포 이후의 시장 반응이 현상을 잘 보여줘요. 사건 직후 달러는 미국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단기 강세를 보였지만, 금과 은 가격도 거의 동시에 반등했어요. 특히, 속도와 폭에서는 은이 더 눈에 띄었어요. 자금 흐름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나왔는데, 한동안 정체됐던 은 관련 상장지수펀드 자금이 이 시점을 전후로 다시 순유입으로 돌아섰어요.
특히 의미 있는 건, 이 유입이 공포장 한복판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달러가 강해지는 구간에서도 같이 나타났다는 점이에요. 시장은 단기적으로 달러를 안전 통화로 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통화 시스템 리스크에 대비해 은을 함께 들고 가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은이 더 간다고?
은 강세를 단기 과열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수급 구조가 단단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에요. 은은 이미 수년째 공급 부족 흐름이 이어지고 있고, 생산의 상당 부분이 다른 금속을 캐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와요. 즉, 가격이 올라도 생산을 빠르게 늘리기 어려운 구조예요.
여기에 태양광, 데이터 인프라, 전기차 같은 산업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어요. 그래서 은은 통화 가치 하락을 막는 자산이면서, 동시에 산업이 실제로 써야 하는 필수 소재로도 기능해요. 금은 ‘왜 들고 있나’가 비교적 단순하지만, 은은 ‘왜 필요한가’가 계속 늘어나는 자산이에요.
즉, 은은 투자에도 필요하고 산업적으로도 필요해서 변동성이 커요. 그래서 ‘악마의 금속’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지만, 바로 그 성격 때문에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가 강해질수록 희소성이 또렷해지는 은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반응하는 특징이 있어요.
원자재별 자산의 역할
은은 방어 자산과 성장 자산의 경계에 서 있어요. 금이 포트폴리오의 중심을 잡아주면, 은은 그 변화의 속도를 키워서 보여줘요. 백금과 구리도 같은 큰 흐름 위에 있지만 반응 속도는 달라요. 백금은 저평가 해소와 산업 전환이 겹치고, 구리는 실물 인프라 투자 사이클과 더 맞닿아 있어요.
은은 통화와 산업, 투자 심리가 한 지점에서 만나기 때문에 더 자주, 더 크게 흔들려요. 그래서 은은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의 ‘중심’이라기보다,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는 자산에 더 가까워요.
앞으로 어떻게 해?
특히 미국 주식과 달러 자산 비중이 높은 중장기 투자자는 포트폴리오 점검이 필요해요. 평소에는 ‘미국이 제일 안전하다’는 전제가 잘 작동하지만,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가 시장의 바닥으로 깔리면 이 전제는 흔들릴 수 있어요. 달러 강세가 나타나더라도 그게 장기적인 구매력 보존을 보장하진 않고, 주식이 견조해 보여도 평가가치가 이미 높아진 상태라면 충격이 왔을 때 방어력이 약해질 수 있어요.
통화 가치가 천천히 희석되는 환경에서 내 포트폴리오의 기준 자산은 무엇인지, 달러 강세만으로 장기 방어가 충분한지, 그리고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가 한 단계 더 진행될 때 어떤 자산이 가장 먼저 반응해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잡아줄지를 확인해보세요.
